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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이 지나 더듬어 가는 4.3의 여정

제주4.3항쟁 유족과 한국기독교협의회 목사 80여명 참여.. 14연대 주둔지,만성리 형제묘 등 차례로 답사

  • 입력 2018.10.19 10:58
  • 수정 2018.10.19 14:02
  • 기자명 전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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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유적지 순례에 참가한 유족들이 주철희 박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18일 전남동부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가 주최한 ‘여순항쟁 70주년 기념 평화기행’이 열렸다.

이날 평화기행에 참여한 제주4.3항쟁 유족회와 한국기독교협의회 목사 등 80여명은 시민들이 봉기한 길을 그대로 더듬어가며 당시의 모습을 상상했다. 

당시 전국에는 총 15개의 연대가 있었고 1개 연대 정원이 2700여명인 점을 감안할 때 여수 14연대의 봉기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병력이었다.

여순항쟁의 현장을 더듬어가는 길에서 맨 먼저 참가자들이 찾은 곳은 당시 시내 중심지였던 충무동 오거리였다.

1948년 이곳은 지금과 달리 삼거리였으며 여수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현재 원금당 옆길로 가면 여수시내가 나왔다. 주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10월 20일 새벽, 14연대는 구례 지리산으로 향하는 도중 이곳 오거리에서 경찰과 첫 전투를 벌였고, 교전 당시 충무지서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주변은 여순항쟁 당시 모두 불에 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 지금의 모습은 이후 완성된 것이다.

원금당 사이 좁은 길. 1948년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 당시 이곳 건물은 모두 일제강점기 목조건물이었다. 여수에 군산이나 목포만큼 일제시대 건물이 없는 이유는 여순항쟁으로 전부 불탔기 때문이다.

다음 장소는 중앙동 로터리였다. 이곳에는 당시 조선식산은행이 있었으나 여순항쟁으로 조선식산은행건물 주변은 모두 불바다가 되어 재만 남았다. 

10월 27일 삼군합동작전에 의해 점령되기까지 9일 간 딱 한번 여수군인민위원회가 지금 통만두집이 있던 우체국에서 '여수인민보'라는 신문을 발행했다.  그 신문에는 14연대 봉기 이유와 지역 인민위원회가 펼친 정책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26일부터 3일 연속으로 난 불로 시내 전체 건물이 모두 소실되며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현재 보수공사 중인 진남관 모습

이후 참가자들은 1948년 10월 20일 인민대회가 열렸던 진남관으로 향했다. 진남관 육교로 이어진 능선에서 14연대는 경찰과 두 번째 교전을 벌였으며 여기서 경찰이 패배했다.  이틀 뒤인 10월 22일 현재 진남통증의학과가 들어선 이 건물에서 인민대회가 열렸다.

지금은 보수공사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 유물전시관 뒤의 하얀 건물은 2층이 베란다실로 지어졌으며 바로 그 베란다에서 인민위원회가 개최됐다고 주 박사가 설명했다.

당시 인민대회가 열린 통증의학과 건물

주 박사는 바로 이 베란다 아래 거리에서 청중들이 모여 연설을 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인민위원장이 발표한 결의안 6개 중 하나가 “우리는 조선인민공화국을 따른다”였다. "정부는 이 문장에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넣어 이들을 북한을 추종하는 사람들로 둔갑하여 진압을 정당화하였다. 이들의 기만은 당시의 기록과 미군의 기록에 민주주의라는 말이 없다는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게 주 박사의 설명이다.

주철희 박사는 여순항쟁이 제주 4.3항쟁과 다른 점으로 현재 남아있는 사진의 개수를 들었다.항쟁이 벌어진 1948년, 여수에 있던 두 명의 기자가 많은 현장사진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경모(당시 호남신문 기자)기자와 미국 칼 마이던스 기자가 그들이다. 가장 유명한 사진은 길에서 사람들이 손을 들고 나오는 사진이다. (충무주차장 골목에서 나오는 사람들) 이 사진은 라이프지 12월호에 ‘revolt in korea' 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형제묘였다.

여순 4.3항쟁의 장소로 빠질 수 없는 곳이 형제묘이다. 형제묘 앞에 모인 참가자들은 잠시 묵례를 하며 애도를 표했다.

참가자들 중에는 현재 제주4.3희생자유족회 회장 직무대행을 맡고 있는 오임종 씨도 있었다. 그는 이번 여수 방문을 두고 “제주4.3항쟁으로 시민 3만명이 죽어나갈 때 동포를 죽일 수 없다는 이로운 항거를 한 여수의 의인들을 찾아뵈러 온 길”이라고 말했다.

제주4.3항쟁 유족 오임종 씨

오임종(60) 씨는 과거에도 다른 유족과 함께 여수를 찾은 적이 있지만 이렇게 자세한 설명을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오늘 주철희 박사의 설명을 듣고 나니 여수 14연대는 제주도민 항쟁을 거부한 의인들임을 알았다”고 감사해했다.

그는 제주4.3항쟁으로 여섯 분의 가족을 잃었다. 할아버지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작은할아버지 총 네 분이 하루에 돌아가셨다. 한달 후에 작은할머니마저 돌아가셨고 다른 한 분의 할아버지는 아직도 행방을 찾지 못했다.

제주도 초토화작전이 벌어진 음력 10월 보름, 오 씨가 살던 마을 가시리도 이때 모두 불탔다고 그는 말했다. 해안지역으로 내려간 그의 가족은 한달 후인 11월 착출 당했다. 군인은 행방불명인 할아버지의 이유를 물으며 그의 가족을 도피자 가족으로 규정했고 이 과정에서 가족 네 분이 사살당했다.

그러다보니 오 씨의 가족은 네 분의 제사를 같은 날 모시고 있다. 아직도 행방불명인 할아버지의 제사는 생신날 지내기로 가족들은 결정 내렸다. 그날 살아남은 할머니 등에는 작은 아버지가 업혀있었고 손에는 오 씨의 아버지 손이 들려 있었다. 고모 두 분도 그때 할머니와 함께 살아남았다고 그는 설명했다.

제주 화북동에서 온 유족 강봉효 씨

제주 화북동에서 온 강봉효 씨의 사정도 비슷하다. 그는 태어나기도 전 4.3항쟁으로 외할아버지를 잃었다. 강 씨의 아버지가 열 살이던 해, 우체국에서 근무하던 할아버지는 그대로 잡혀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강 씨는 이후 할아버지의 행방을 알 수 없었고 가족들은 할아버지가 잡혀간 그날을 제삿날로 정했다. “아버지가 누나인 큰어머니의 손을 잡고 그 어린 나이에 목숨을 부지하려 숨어다니셨다”고 그는 씁쓸하게 말했다.

현재 강 씨는 4.3관련 행사라면 어디든 빠지지 않고 참여한다. 빨갱이로 몰려 끌려갔던 대전과 광주의 형무소가 있던 곳도 다녀왔다. “이제는 그 터에 당시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아 가슴이 아프다”고 그는 말했다.

이번 여순항쟁 유적지 순례에 참여한 이유도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을 통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꾸준히 듣다보니 자연스럽게 역사를 알아보고픈 마음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는 “여수시와 순천시, 제주시 모두 유대를 맺어 이 사건을 해결하길 바란다”고 바람을 전했다.

이날 평화기행이 끝난 후 참가자들은 노마드 갤러리에서 기록전을 관람하고 ‘여순항쟁과 한국교회’를 주제로 자유토론을 가졌다.

한편 여순항쟁이 일어난 19일 당일 오후 2시에는 여수YMCA 2층 강당에서 추모예배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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