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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181018 [여순사건 70주년] 3살 때 국군이 철도 기관사 부친 총살… 모친 “이승만이 죽였다”

"빨갱이 자식" 낙인 73세 장경자씨 


여수 14연대, 제주4·3 진압 거부하고 봉기 

“얘기 한 번 들어봅시다” 한마디 꺼낸 부친, 순천 장악한 국군에 체포된 뒤 29세 사살  
지역사령관 계엄령에 민간인 1만명 학살  
장씨 “연좌제 낙인 고통… 진실 규명돼야”

지난 15일 ‘여순항쟁 기록전’이 열린 전남 여수 노마드갤러리에서 여순사건으로 아버지와 시아버지를 잃은 장경자씨가 아버지의 사진을 들고 서 있다.06c2ca909b9fb70cc31111a0ee3d7857_1540003841_9507.jpg

▲ 지난 15일 ‘여순항쟁 기록전’이 열린 전남 여수 노마드갤러리에서 여순사건으로 아버지와 시아버지를 잃은 장경자씨가 아버지의 사진을 들고 서 있다.

 

“철도 기관사였던 아버지는 70년이 지나도록 아직 퇴근을 못 했습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제14연대 군인들은 제주 4·3 진압을 위한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한다. ‘여순사건’의 시작이다. 장경자(73)씨는 그때 3살이었다. 14연대는 10월 20일 순천을 장악했고, 3일 후 국군이 순천을 되찾았다. 며칠 후 국군으로부터 출근 명령을 받은 장씨의 아버지는 평소대로 순천 철도국으로 출근했고,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군은 아버지를 철도국 창고에 가뒀다. 14연대가 순천을 장악했을 때 아버지가 동료들에게 “14연대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봅시다”라고 얘기했고, 국군이 다시 순천에 들어왔을 때 누군가가 14연대를 옹호했다고 아버지를 밀고했다. 군경의 날카로운 의심은 곧장 아버지를 향했다. 

장씨의 어머니는 창고에 갇혀 있던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옷을 빨아 달라며 전달한 속옷의 고무줄에 ‘군기병을 잡으시오’라고 적힌 종이가 들어 있었다. 군인 한 명을 찾아 억울함을 호소해 달라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군인 중에 지인이나 친척은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그해 11월 30일 29세의 나이로 순천 이수중학교에서 사살됐다. 장씨는 “여기서 학살당한 사람만 102명이었다”면서 “계엄법도 없었는데 지역사령관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람을 죽였다”고 억울해했다. 여순사건 1년 후인 1949년 10월 전남 당국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민간인 희생자가 여수·순천을 포함해 전남 동부 지역에서만 1만 1131명에 달했다.

1948년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이 좌익 계열 시민 등을 솎아내 재판에 넘기기 위해 호송하고 있는 모습. 행렬 앞 오른쪽 키 큰 사람이 장씨의 시아버지다. 20세기 최고 종군기자로 꼽히는 미국의 칼 마이댄스가 촬영한 사진이다.06c2ca909b9fb70cc31111a0ee3d7857_1540003924_568.jpg

▲ 1948년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이 좌익 계열 시민 등을 솎아내 재판에 넘기기 위해 호송하고 있는 모습. 행렬 앞 오른쪽 키 큰 사람이 장씨의 시아버지다. 20세기 최고 종군기자로 꼽히는 미국의 칼 마이댄스가 촬영한 사진이다.

 

장씨는 60세에 이르기까지 아버지가 정확히 어떻게 사망했는지 모르고 살았다. 여순사건 과정에서 돌아가셨다는 얘기 정도만 들었다. 환갑이 넘어서야 국군에게 살해된 사실을 알게 됐다. 그동안 장씨에게 말해 주는 사람도, 묻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철로 근처에 살았던 어머니는 열차 기적이 울릴 때마다 “저 소리가 무섭다. 이승만이 너희 아버지를 죽였다”는 말을 되뇌었다. 장씨는 “어머니가 욕하던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이 학교, 경찰서, 면사무소 등 가는 곳마다 걸려 있어 혼란스러웠다”고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장씨의 시아버지는 여수에서 희생됐다. 10월 19일 여수를 장악한 14연대는 군청의 양곡창고를 개방해 시민들에게 배급했다. 여수 군청에서 근무하던 시아버지는 14연대의 지시대로 쌀을 배급한 것이 죄가 됐다. 대구형무소로 끌려간 시아버지는 1950년 7월 7일 대구 경산면에서 처형됐다. 

장씨와 그의 남편은 아버지의 부재와 연좌제로 고통을 받았다. 남편은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원했으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시절 장씨는 국방부에서 6년간 경리로 일했다. 장씨는 “아버지가 누구한테 죽은지도 모르고 일을 했다”면서 “국군이 아버지를 죽였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독신 생활을 이어 가던 장씨는 2010년 여순사건의 진실을 찾던 중 ‘동병상련’을 앓던 남편과 만나 결혼했다. 남편은 진실 규명이 이뤄지는 걸 보지 못하고 지난해 사망했다. “이부형제인 남편의 동생도 우리 부부를 ‘빨갱이’ 자식들이라고 욕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했겠습니까.” 담담하게 가족의 비극사를 이어 오던 장씨는 남편 얘기를 하면서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글 사진 여수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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